미중 규제 충돌, 韓 파운드리·소재 이중 압박 구조 심화

미 상무부는 엔비디아·AMD AI 반도체의 제3국 수출에 미국 정부 사전 허가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현재 엔비디아 H100·H200 기준으로 한국 데이터센터 수요 물량의 30~40%가 미국 직수입 경로로 들어오는 만큼, 허가제가 발동되면 조달 리드타임이 현재 6~8주에서 최장 20주 이상으로 늘어날 수 있다.
동시에 중국은 갈륨·게르마늄·흑연·희토류 4개 품목의 수출 통제를 유지하면서 한국의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에 필요한 소재 가용량을 압박하고 있다. 갈륨 기준 한국의 중국 의존도는 2023년 규제 이전 약 80%, 게르마늄은 60% 수준이었다.
미중 정상회담(2025년 5월)에서 반도체 분야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엔비디아의 중국향 H20 칩 판매 재개 여부도 불확실한 상태가 지속되고, 한국 HBM 수요처(엔비디아가 최대 고객인 SK하이닉스 기준 HBM 매출 비중 약 40%)는 물량 배분 계획을 수정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파운드리(삼성전자 파운드리·DB하이텍)는 중국 팹리스의 위탁 물량을 수주해 왔는데, 미국 수출 허가제가 시행되면 중국 고객사 설계 칩의 제조 가능 여부 자체가 미국 허가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미 일부 파운드리 계약은 '규제 불확실성 조항'이 삽입되는 추세다.
한국 반도체 기업이 직면한 이중 압박은 단순한 무역 갈등이 아니라 '수요-원자재 양방향 통제'라는 구조적 문제다. 미국이 수요처 칩을 허가제로 묶고, 중국이 소재를 봉쇄하면 한국 기업은 두 강대국의 규제 타임라인에 생산 일정 자체를 맡기는 상황이 된다.
이 구조에서 가장 취약한 고리는 갈륨 기반 GaN(질화갈륨) 전력반도체 소재다. GaN 기판은 현재 국내 자체 생산이 거의 없고, 중국산 갈륨 없이는 GaN 에피 웨이퍼 제조가 불가능하다. 고려아연의 2028년 갈륨 양산이 현실화되기 전까지 이 공백은 유지된다.
미국 수출 허가제 도입 시 미국 팹(TSMC 애리조나·인텔 파운드리)과 한국 팹 간 '허가 우선 배분' 협상에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는 메모리 HBM 공급자로서 미국 측과의 협력 레버리지를 높일 수 있다. 특히 SK하이닉스의 HBM3E는 엔비디아 Blackwell GPU에 사실상 단독 공급 구조라 교섭력이 있다.
소재 측면에서는 갈륨·게르마늄 대체 공급망을 확보 중인 고려아연과 국내 GaN 에피 웨이퍼 기업(에피스타, RF머트리얼즈)이 중국산 대비 프리미엄 포지션을 확보할 수 있다.
중국 팹리스 물량에 의존해 온 한국 파운드리(특히 8인치 레거시 라인)는 미국 허가제가 발동되면 중국발 위탁 주문이 줄어들 위험이 있다. DB하이텍 기준 매출의 약 20%가 중국 고객사 관련 물량으로 추정된다.
갈륨·게르마늄을 중국에서 직수입해 온 국내 중소 소재 가공사들은 재고 소진 이후 원가 상승 압박이 불가피하다. 2024년 하반기 이후 갈륨 현물가는 kg당 350달러 수준으로 2023년 규제 전(약 230달러) 대비 52% 상승한 상태다.
파운드리·소재 기업 구매담당자는 미국 BIS(산업안보국) 수출 허가 의무화 고시 일정을 분기별로 추적해야 한다. 허가 대상 품목 목록(CCL)에 첨단 반도체 제조장비·소재가 추가되는 시점이 실질적 조달 병목의 출발점이다.
HBM 투자자라면 엔비디아 H20 중국 판매 재개 여부를 SK하이닉스 HBM 출하 물량의 선행지표로 활용할 것. 재개 시 SK하이닉스 HBM 분기 출하량이 10~15% 추가 상향될 수 있는 구조다.
실제 조달 현장에서는 — GaN 에피 웨이퍼를 중국산 갈륨으로 만들어 공급하던 라인이 2024년 3분기부터 안정적 수급 불가 통보를 받기 시작했다. 대체 루트로 일본 스미토모화학·독일 프라이베르거 공급분이 거론되지만, 납기는 16~24주, 가격은 중국산 대비 40~60% 높다. 이 차이를 흡수할 수 있는 기업만 지금 당장 장기 계약에 서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