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기술패권 교착, 韓 반도체 '안도'의 실체와 다음 리스크

최근 미·중 정상회담에서 반도체·AI 기술 분야의 구체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엔비디아 H20의 중국 판매 재개 여부는 여전히 불확실하며, 미국의 AI칩 수출 전면 허가제(Framework for AI Diffusion) 최종 확정도 지연되고 있다. 이 규제 공백이 단기적으로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HBM 수요 구조를 압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국내 반도체 업계는 '안도' 상황이다.
서울대학교 국가미래전략원이 최근 개최한 '미·중 기술패권 경쟁과 대한민국의 전략' 포럼에서는 한국이 미국 주도의 칩4(Chip 4) 동맹과 중국 시장 의존이라는 이중 구조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압박이 가중되고 있다는 분석이 제시됐다. 삼성전자의 중국 반도체 매출 비중은 여전히 20% 내외로 추정된다.
미국 상무부는 2024년 10월 최종 확정한 '첨단 AI칩 수출 규제'를 통해 H100 이상 GPU의 중국 수출을 사실상 차단했으며, 엔비디아가 중국용으로 설계한 H20도 2024년 4월 추가 통제 대상에 포함시켰다. 이 상황에서 한국 HBM의 최대 고객인 엔비디아의 중국향 물량이 줄면 HBM 주문도 연동해 감소할 수 있다.
중국 측은 화웨이 어센드 910C, 캄브리콘 등 자국 AI칩 개발을 가속화하며 비엔비디아 공급망 구축을 추진 중이다. 화웨이의 AI 서버 출하 목표는 2025년 약 80만 대로 알려지며, 이 중 HBM을 삼성·SK에서 조달할 수 있을지가 대한민국 반도체 업계의 실질적 변수가 됐다.
한국 반도체의 '안도'는 정확히 말해 '결정이 연기된 것'에 대한 안도다. 미국이 AI칩 수출 허가제를 최종 확정하지 않은 동안은 한국 기업이 미국 규제와 중국 시장 사이에서 당장 선택을 강요받지 않는다. 하지만 규제가 확정되는 순간, 한국 반도체·소재 업체의 포지션 재설정은 피할 수 없다.
서울대 포럼에서 제기된 핵심 화두는 '기술 중립은 가능한가'이다. 소재·장비·설계 전 공정에서 미국 기술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사실상 중립 옵션이 없다는 것이 현실에 가깝다. 한국이 전략적 균형외교를 유지하려면 소재·부품의 국산화율을 높여 협상 레버리지를 키우는 것이 유일한 실질 경로다.
SK하이닉스: HBM3E 양산 비중이 높고 엔비디아 공급 비중이 삼성보다 크다. 미·중 교착이 지속되는 동안 엔비디아의 비중국 시장 출하가 유지되면서 HBM 수요는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미국 팹리스(엔비디아, AMD, Qualcomm): 규제 교착 속에서도 비중국 시장 AI 인프라 투자가 가속화되면서 매출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2025년 1분기 매출 가이던스는 430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65% 이상 성장이 예고됐다.
삼성전자 파운드리·메모리: 중국 매출 비중 20%가 미국 규제 확정 시 직격을 받는다. 특히 HBM 공급에서 SK하이닉스 대비 점유율이 낮은 상황에서 중국 수요마저 줄면 이중 압박이 현실화된다.
화웨이 AI칩 공급망 편입을 노리는 소재·부품사: 미국 규제 저촉 여부를 검토하지 않고 화웨이향 공급 계약을 체결하면 미국 기술 라이선스 취소 위험에 노출된다. 미국의 외국직접제품규정(FDPR) 적용 시 한국 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반도체 소재·부품 공급사는 지금 자사 제품의 미국 기술 함유율(EAR 해당 여부)을 법무팀 및 무역 전문가와 함께 재검토해야 한다. 화웨이·캄브리콘 공급망에 편입하려는 경우, FDPR 저촉 가능성을 사전에 확인하지 않으면 미국 거래처와의 관계 전체가 위험해진다.
투자자는 미국 AI칩 수출 허가제 최종 확정 시점을 트리거로 주시해야 한다. 규제 확정 직후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중국향 매출 조정폭과 대체 시장(인도·중동·유럽) 확보 속도가 주가 방향을 결정한다.
실제 조달 현장에서는 — 미·중 규제 교착 속에서 국내 반도체 소재 공급사들이 '미국 규제 클리어런스 인증'을 영업 도구로 내세우는 현상이 강해지고 있다. 미국 정부의 승인된 공급망(Trusted Supplier 리스트)에 등록된 국내 업체는 미국계 팹리스 조달 입찰에서 경쟁 우위를 갖는다. 이 리스트 등록 여부가 향후 수주 여부를 가를 가능성이 크다.